1999년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허준’은 동의보감을 집대성한 조선시대 명의 허준의 일대기를 다룬 정통 사극으로, 한국 드라마 역사상 손에 꼽히는 국민 드라마로 기억된다. 최고 시청률 63.5%를 기록하며 당대의 전 연령층에게 감동을 안긴 이 드라마는, 단지 한 명의 명의를 조명한 전기물이 아닌, 사람과 생명, 고난과 인내, 그리고 진정성 있는 삶의 자세에 대한 깊은 울림을 남긴 작품이다. 당시 나는 대학 3학년으로 바쁜 일상 속에서도 일요일 저녁만큼은 집에 꼭 들러 가족과 함께 TV 앞에 앉아 이 드라마를 챙겨보곤 했다. 그 시절, 허준의 인생 여정을 따라가며 나 역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고, 지금 48세가 된 이 시점에서 그 울림은 더 진하게 남는다. 이 글에서는 ‘허준’이 단지 과거의 명작이 아닌, 지금도 가치 있는 이야기로 남아 있는 이유를 되짚어본다.
1999년의 일요일 밤, 허준과 함께했던 우리 가족의 시간
1999년 가을.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서울로 상경해 독립생활을 시작한 지도 꽤 되었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고향집으로 내려가곤 했다. 바쁜 학과 생활, 아르바이트, 취업 준비로 하루하루가 빠듯했지만, 일요일 저녁만큼은 집에 앉아 텔레비전 앞에 모여 ‘허준’을 보는 시간이 우리 가족의 소중한 일상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각자 원하는 콘텐츠를 골라보는 시대지만, 그 시절엔 한 집안이 하나의 드라마를 함께 보는 문화가 있었다. 아버지는 조선시대 배경의 사극을 좋아하셨고, 어머니는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즐기셨다. 나는 대학생이 되어 사회에 대한 시선을 키워가던 시기였고, 그런 우리 모두가 ‘허준’을 함께 보며 각자의 이유로 감동을 받았다.
드라마는 천민 출신인 허준이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 끝에 조선 최고의 명의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렸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신분의 벽, 사회의 부조리, 인간관계의 배신, 환자들의 고통까지.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항상 사람의 생명을 우선시했다.
그 시절 나는 허준을 보며,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를 고민했다. 경쟁에 치이고, 스펙을 따지던 20대의 불안한 마음 한켠에서, 허준의 묵묵한 인내는 묵직한 울림을 줬다. 지름길 없이 천천히, 그러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비록 수백 년 전 인물이었지만 나보다 더 현대적이고, 더 인간적이었다.
당시 20대 중반이던 내가 그 감정을 온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 48세가 되어 다시 그 드라마를 떠올리면, 허준이 남긴 울림은 그때보다 훨씬 깊고 넓게 다가온다.
허준이라는 이름에 담긴 진심, 그리고 삶의 태도
‘허준’은 조선 시대 명의 허준의 생애를 다룬 드라마지만, 단순한 전기물이 아니었다.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은, 인간 ‘허준’의 시련과 성장, 그리고 끝없는 자기성찰에 있었다.
그는 천민 출신이라는 굴레를 지닌 채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고, 여러 번의 실패와 좌절, 유배와 갈등을 겪으며 성장해간다. 하지만 그는 늘 환자 앞에선 평등했고, 생명을 대하는 자세는 한결같았다.
의학적 지식이나 정치적 성공보다는, 허준이 끝까지 지켜낸 태도와 신념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백성의 생명을 하늘같이 여긴다’는 말이 그저 드라마 속 대사가 아닌, 그가 평생을 관통한 가치였다는 것을, 우리는 매 회차에서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 후반부에서 허준이 유배지에서 동의보감을 편찬하는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다. 주변의 도움도, 명예도 없이, 그저 백성을 위해 의서를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수많은 질병을 기록하고 정리하던 모습. 나는 그 장면에서 ‘진정한 성취는 외부의 인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사명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연기자 전광렬의 묵직한 연기, 그리고 이순재, 황정민, 박은혜 등 조연들의 빈틈 없는 열연은 극의 완성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특히 사형장에 서서도 환자의 상태를 걱정하던 허준의 장면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철학이었다.
드라마 ‘허준’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의학, 역사, 윤리, 인간관계 등 다양한 영역을 진지하게 아우르는 깊이 있는 드라마였다. 자극적인 전개 없이도, 사람의 삶을 찬찬히 따라가며 그 안에서 묵직한 감정을 끌어내는 힘은 지금도 보기 드물다.
나는 그 드라마를 통해, 어떤 위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삶의 태도’라는 걸 배웠다. 그리고 그 교훈은 지금도 내 삶을 지탱하는 하나의 원칙으로 남아 있다.
지금 다시 꺼내보는 ‘허준’, 여전히 필요한 이야기
나에게 ‘허준’은 단지 오래된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인생의 좌표 같은 작품이다. 중학생 시절 소설로 처음접한 '허준'은 나에게 너무 큰 영향을 미쳤다. 너무 재미있고 인상깊어서 용돈을 모아 소설책 3권을 모두 구매하고 읽고 또 읽었다. 그랬던 그 '허준'이 드라마로 나온것이었다. 감정을 숨기고 유약하고 튀지 않으려하는 성격의 나에게 허준은 정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인물이었다.
20대 때는 허준의 노력과 고통을 ‘위대한 성공’으로만 바라봤지만, 지금은 그가 지켜온 ‘가치와 태도’에 더 마음이 간다. 세상이 변하고, 기준이 흔들리는 지금 같은 시대일수록, 어떤 마음가짐으로 하루를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허준’은 그런 메시지를 준다. 겉으로 드러나는 성과보다, 안에서 쌓아가는 진심의 힘. 누군가를 살리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인간다운 행동이기도 하다.
요즘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이야기가 넘쳐난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울리는 건, 진심을 담은 이야기다. 그리고 ‘허준’은 그 진심의 정수를 담은 드라마였다.
드라마가 끝난 지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마지막 대사를 기억한다. “지금부터 백성을 위해 책을 쓰겠습니다.” 그것은 단지 의학서 편찬의 선언이 아니라, 인생을 어떻게 마무리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숭고한 고백이었다.
‘허준’은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 깊이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드라마. 우리는 여전히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