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애기야, 가자” 그 말 한마디에 심장이 뛰던 그 시절, 파리의 연인

by diary1010 2025. 5. 4.

드라마 파리의 연인 포스터
파리의 연인

 

2004년 방영된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은 당시 대한민국 전역에 ‘애기야, 가자’ 열풍을 일으키며 로맨스 드라마의 새로운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박신양, 김정은, 이동건 주연의 이 작품은 단순한 신분 차이 로맨스를 넘어서, 사랑의 본질과 인간적인 진심에 대해 질문을 던졌으며, 시청률 50%를 넘나드는 기록으로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올랐다. 당시 나는 사회생활 3년 차였고, 월요일 아침 회사 복도에서는 전날 방송된 ‘파리의 연인’ 이야기로 하루가 시작됐다. 20대 후반의 불안한 연애 감정과 안정되지 않은 직장생활 속에서, 드라마는 마치 나를 위한 위로와 대리만족이 섞인 한 편의 환상처럼 다가왔다. 결혼도 하고 훌쩍 큰 아이의 엄마가된 지금, 다시 떠올려보는 ‘파리의 연인’은 단순한 추억 그 이상이다. 사랑을 믿게 만들고, 일상의 감정을 흔들어놓았던 그 드라마의 울림을 다시 꺼내보고자 한다.

2004년 여름, ‘파리의 연인’이 내 가슴을 흔들었던 이유

2004년이면 나는 1977년생으로 사회생활을 막 3~4년 정도 했던 시기였다. 입사 초기의 긴장감은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직장인으로서의 무게가 버거웠던 20대 후반이었다. 그 여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밤이면 나는 아무 약속도 잡지 않았다. SBS에서 방송되던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드라마는 단순히 잘생긴 재벌 남자와 평범한 여자의 로맨스라는 익숙한 틀에서 시작했지만, 박신양이 연기한 ‘한기주’의 묵직한 대사 한 줄 한 줄은 내 일상 속 현실과 감정을 조용히 흔들어놓았다.

당시 나 역시 감정적으로 서툴렀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표현은 서툴렀고, 직장에서는 일보다 관계가 더 어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드라마 속 한기주는 말수가 적고 무뚝뚝했지만, 그 속에 담긴 진심이 얼마나 깊은지 화면 너머로도 전해졌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내가 되고 싶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김정은이 연기한 ‘강태영’은 무모하지만 용감한 여자였다. 프랑스 유학이라는 설정도 낭만적이었지만, 사실은 열정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공감이 갔다. 사랑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던 그녀는, 우리가 모두 한때 가졌던 순수한 감정 그 자체였다.

드라마는 사랑을 과장하지 않았다. 화려한 배경 속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비 오는 날 카페에서 눈을 맞추고 조용히 대화하던 장면들이었다. 그건 오히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감정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빠져들었고, ‘애기야, 가자’라는 한 마디가 그렇게 전국을 뒤흔들었다.

“애기야, 가자” 한 마디로 완성된 감정의 정점

‘파리의 연인’은 많은 로맨스 드라마들이 그랬듯이, 신분 차이와 주변의 반대를 주된 갈등 구조로 삼았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특별했던 이유는, 인물의 감정선과 감정 표현 방식이 매우 섬세하고 내밀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박신양의 ‘한기주’는 재벌 그룹의 상무로, 외모와 능력을 모두 갖췄지만 감정 표현에는 익숙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가 강태영에게 마음을 열기까지의 과정은 느렸지만 진심이 있었다. 극 중에서 “애기야, 가자”라는 대사가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며 신드롬이 되었지만, 사실 그 말이 울림을 주는 건 그 한 마디로 그동안 쌓아온 모든 감정이 응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연기한 강태영은 대학 강사로 생활력이 강하고, 흔들리면서도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모습에서 당시 나와 주변 친구들은 많은 위로를 받았다. 우리도 그렇게 혼란스러웠고, 일도 사랑도 불안했다. 그래서 그녀의 눈물에 공감했고, 웃음에 같이 안도했다.

이동건이 연기한 ‘윤수혁’ 또한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기주의 이복동생이자, 사랑 앞에서는 조금 더 솔직한 인물이었다. 세 사람 사이의 감정선은 단순한 삼각관계를 넘어서, 각자의 상처와 선택을 드러내는 장치였다.

‘파리의 연인’이 유독 강렬했던 이유는, 사랑이 감정 이상의 무엇이라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대사 한 줄, 시선 하나, 손을 잡는 장면 하나하나에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울었고, 설렜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OST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너의 곁으로’, ‘처음 그 자리에’ 같은 곡은 드라마의 감정선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시청자의 감정을 증폭시켰다. 지금도 그 노래가 흘러나오면, 나는 2004년 여름의 한기주와 강태영이 눈을 마주치던 장면이 떠오른다.

회사를 다니며 야근을 하던 날에도, 주말 밤엔 꼭 본방을 챙겨봤다. 혼자 사는 원룸 거실, 조용히 앉아 드라마를 보며 웃고 울던 나. 그 드라마가 끝나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강한 감정이 밀려왔던 작품이었다.

20년이 흘러도 여전히 반짝이는 ‘파리의 연인’

2025년. 나는 이제 마흔여덟 살이 되었다. 사랑이란 단어 앞에서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게 된 것도 같지만, 아직도 ‘파리의 연인’을 떠올리면 가슴 한 켠이 묘하게 따뜻해진다. 지금의 남편과 한참 연애시기에 봤던 드라마라 함께 보면서 조언도 하고 요구도 하면서 무뚜뚝한 남편을 고쳐보고자 무던히 노력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무던한 사이가 되었지만 가끔 남편에게 '사랑해달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한다. 아직 포기하지 못하고 있나 보다. 

20대 후반의 나는 드라마 속 한기주처럼 무뚝뚝했고, 강태영처럼 흔들렸으며, 윤수혁처럼 좌절을 모른 척하며 웃던 시절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드라마는 단순히 TV 화면 속 이야기였지만, 어느새 내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파리의 연인’은 단지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서로를 향한 신뢰,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질문이 담긴 작품이었다.

지금 다시 봐도 그 감정선은 전혀 낡지 않았고, 오히려 그 시절보다 더 뭉클하게 다가온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저 설렘이 아니라, 그 사람을 끝까지 바라보겠다는 선택임을 이 드라마는 말해주었다.

세상이 많이 변했고, 감정 표현의 방식도 달라졌지만, 여전히 우리는 그 한 마디를 기억한다. “애기야, 가자.” 그 말이 그토록 깊은 울림을 준 건, 말보다 마음이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의 연인’은 그렇게, 지금도 내 안에 반짝이는 감정 하나로 남아 있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지만, 다시 꺼내볼 수는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여전히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