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은 하지원, 조인성, 소지섭, 박예진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출연한 정통 멜로 드라마로, 세 남녀의 엇갈린 사랑과 욕망, 계급과 현실의 벽을 그리며 시청자들의 강한 몰입을 이끌어냈다. 마지막 회의 충격적인 결말은 지금도 회자될 정도로 파급력이 컸으며, "왜 그랬을까"라는 대사는 한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한 줄로 남았다. 당시 나는 27세였다. 세상에 점점 적응해 가던 시기였지만, 여전히 감정의 끝에서는 미숙했고, 사람과 사랑에 대한 감정에 혼란스러움을 겪던 때였다. 드라마 속 이수정, 정재민, 강인욱의 관계는 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았고, 그 감정의 흐름에 나도 어느새 완전히 잠식당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48세가 된 나는, ‘발리에서 생긴 일’을 다시 떠올리며 그 시절 품었던 질문에 스스로 답을 해본다. 우리는 왜 그렇게 아팠을까?
2004년 봄, 우리는 사랑도 감정도 감당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 시작했다
그 시절, 나는 27살이었다. 첫 직장을 버텨내느라 매일이 전쟁 같았고,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보다는 버티는 데 급급했던 시기. 그렇다고 감정이 무뎠던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날것 같아서, 작은 일에도 쉽게 무너지고, 좋아하는 마음조차도 불안해서 애써 외면하곤 했다.
그런 내게 ‘발리에서 생긴 일’은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었다. 그건 마치 내 안에 감춰진 감정의 잔재들을 하나씩 끌어올리는 심리극 같았다. 하지원이 연기한 ‘이수정’은 현실에 지친, 평범하지만 굳세고 당찬 여자였다. 그리고 조인성의 ‘정재민’은 돈과 배경은 있었지만, 감정 앞에서는 누구보다 불안정했다. 소지섭의 ‘강인욱’은 상처받은 자존심과 사랑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인물이었다.
처음에는 발리에서의 가벼운 로맨스로 시작했던 이야기가, 서울로 돌아와 본격적인 갈등과 감정의 균열로 접어들면서 나도 모르게 매주 그들의 감정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특히 “왜 그랬을까”라는 마지막 재민의 대사는 단순한 독백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던 우리 모두의 내면에서 튀어나온 외침처럼 들렸다. 우리도 사랑하면서 상처주고, 붙잡으면서도 밀어내고, 가까우면서도 멀어졌던 그 모든 순간에 그 질문을 삼켰다 – ‘왜 그랬을까.’
사랑, 욕망, 자존심… 감정이 충돌하는 현실의 서사
‘발리에서 생긴 일’이 특별했던 이유는 감정을 극적으로 밀어붙이면서도, 그 안에 현실의 무게를 담아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계급, 경제적 배경, 인간 본성의 충돌을 보여준다.
이수정은 돈이 없고, 미래가 불안하지만, 감정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 명확한 인물이다. 그녀는 사랑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삶이 허락하지 않았다. 강인욱은 과거의 상처를 감추고, 이수정을 향한 사랑으로 삶을 회복하려 했지만, 그 감정은 점점 집착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정재민. 누군가에겐 단순한 ‘재벌 2세’일지 몰라도, 그는 누구보다 불안하고 외로웠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를 놓지 못했고, 놓을수록 더 파괴적인 선택을 하게 됐다.
이 드라마의 진짜 주제는 “사랑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끝내, 그 사랑은 세 사람 모두를 구원하지 못했다. 결말에서 총성을 울리던 재민, 쓰러지던 인욱, 숨을 거두던 수정. 그 장면은 말 그대로 충격이었다. 감정을 감당하지 못한 세 사람이 결국 감정을 끝장내는 방식으로 마무리했던 결말. 그게 당시 내겐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왜냐하면, 나도 사랑을 그렇게 격렬하게 하고 싶었지만 끝까지 책임질 자신은 없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그랬을까”라는 말은 결국, 나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지금은 조금 더 알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감정에 서툴렀다는 걸
이제 나는 그때처럼 격정적인 사랑은 못하더라도, 감정을 조금은 다스릴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 ‘발리에서 생긴 일’을 다시 보면, 그때와는 전혀 다른 감정이 밀려온다.
그 시절엔 사랑이 너무 하고 싶었고, 그래서 사랑을 지키는 방법보다 사랑에 빠지는 감정에 더 취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고, 감정은 표현이 아니라 이해라는 걸.
드라마 속 세 사람은 결국 사랑을 몰랐던 게 아니라, 감정에 너무 솔직했고, 현실에 너무 무력했으며, 결국 책임질 용기가 없었다. 그건 바로 그 시절의 나였고, 어쩌면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왜 그랬을까’ 그 질문은 아프지만,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 감정이 진짜였다는 걸. 그리고 그 드라마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