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상도’는 조선 후기 거상 임상옥의 실화를 바탕으로, 장사를 단순한 이익의 수단이 아닌 인간과 신뢰의 예술로 승화시킨 인물의 일대기를 담아낸 작품이다. 이재룡, 이순재, 김현주, 정보영 등 배우들의 진중한 연기와 함께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전개는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고, 당시 최고 시청률 35%를 넘기며 진정한 인생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2001년이면 나는 25세,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취업 준비에 한창이던 시기였다. 막연한 미래와 끝없는 불안 속에서 ‘상도’ 속 임상옥이 쌓아올린 신념과 철학은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당시 내 삶을 이끄는 나침반이 되었다. 지금 48세가 된 나는, ‘상도’를 떠올리며 다시금 묻는다. 지금 나는 얼마나 사람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
25살의 봄, 나는 장사꾼이 아니라 사람이 되고 싶었다
2001년 봄, 나는 대학 졸업장을 손에 들고 사회라는 이름의 거대한 시장 앞에 막 발을 내딛으려 하고 있었다. 취업은 쉽지 않았고, 경쟁은 치열했으며, 앞날은 불투명했다. 주변 친구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어학원을 다니고, 인턴을 하고, 자격증 공부에 매달리고 있었다. 나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지만, 마음 한 켠은 늘 허전했다. “무언가가 빠져 있다.” 그때 만난 드라마가 바로 ‘상도’였다.
이 드라마는 조선 후기의 상인 임상옥이 어린 시절 고아로 시작해, 전국을 누비는 장돌뱅이 상단에서 시작해 조선 최고의 거상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하지만 ‘상도’는 단순한 성공기가 아니었다. 그 속엔 철학이 있었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있었다. 특히 임상옥의 스승인 유기준(이순재 분)이 “장사는 돈을 남기는 게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하던 장면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좌표가 되어준다.
그 시절 나는 아직 ‘일’도, ‘돈’도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풋내기였다. 하지만 그 드라마를 통해, 나도 모르게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사를 통해 신뢰를 쌓는 법, 거래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태도, 그리고 위기의 순간마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결단력. 이 모든 게, 경쟁과 효율만을 강조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내 마음을 다잡아주었다. ‘상도’는 그렇게, 내 청춘의 이정표가 되었다.
“돈은 잃어도 믿음은 잃지 마라” - 임상옥이 남긴 상도의 본질
드라마 ‘상도’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서사보다, 그 안에 흐르는 ‘상인의 도(道)’에 대한 철학에 있다. 임상옥(이재룡)은 어린 시절부터 억울함과 가난, 배신 속에서 자라나며 ‘돈’이 가진 힘을 체감한다. 하지만 그는 점차 돈이 아닌 ‘사람’의 가치를 우선시하게 되고, 거래를 넘어선 신뢰와 명분을 인생의 중심에 놓는다.
드라마에는 수많은 위기가 나온다. 이익을 위해 거래처를 배신하라는 유혹, 더 큰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잡으라는 부추김, 그리고 권력과 손을 잡으라는 압박. 하지만 임상옥은 그 모든 유혹 앞에서 늘 원칙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 그 장면들이 당시의 내게는 너무도 새롭고, 때론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왜냐면, 현실에선 그런 선택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박혔다. “누군가는 저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상도’는 단순히 역사극도, 상업 드라마도 아니다. 그건 일종의 ‘가르침’이었다. 고객이란 이름 뒤에 있는 사람을 보게 만들었고, 돈이라는 숫자보다 관계의 지속성에 더 무게를 두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성공은 얼마나 벌었느냐보다, 얼마나 남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걸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임상옥이 조선 최대의 상인이 되었을 때조차도 그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 이익을 나누고, 공정한 거래를 강조하는 장면은 ‘상도’가 지닌 고유의 미덕을 잘 보여준다. 그 미덕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비즈니스든 인간관계든, 결국은 신뢰와 진심이 남는다.
48세의 지금, 나는 얼마나 사람을 남기며 살고 있는가
이제 나는 마흔여덟. 회사에서 중간관리자로 팀장의 입장이 되었고, 가정에서도 아이에게 ‘삶의 태도’를 설명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세상은 많이 변했고 이러한 가치관이 가볍게 여겨지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부모로서 우리 아이가 행여 그렇게 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아이를 양육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조금 더 ‘상도’가 떠오른다. 그리고 임상옥의 말들이 내 하루를 다시 정리하게 만든다.
“장사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기는 것이다.” “신뢰는 쌓는 데 평생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는다.” “성공은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과 나눌 때 완성된다.”
이제 나는 돈을 벌기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더 고민한다. 누군가와 일할 때, 그 사람이 나와의 일을 떠올리며 “그래도 그 사람은 믿을 만했지”라고 말해주길 바란다. 그게 내가 드라마 ‘상도’를 통해 배운 진짜 인생의 성공이다.
누군가 내게 “지금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뭘 먼저 하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말할 것이다. “사람을 남기겠다”고. 그 말은 드라마 ‘상도’가, 그리고 임상옥이 내게 남긴 평생의 가르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