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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하사극의 정수, ‘태조 왕건’이 내게 남긴 리더십의 본질

by diary1010 2025. 5. 5.

드라마 태조왕건 포스터
태조 왕건

 

2000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KBS1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의 일대기를 중심으로 펼쳐진 명작 사극이다. 200부작이라는 방대한 분량 속에서 치열한 권력 싸움, 전략과 전쟁, 그리고 인간관계와 충성의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낸 이 드라마는 당시 시청률 60%에 육박하는 기록을 남기며 대한민국 역사 드라마의 전설로 남았다. 당시 나는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고, 매주 주말이면 아버지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 이 드라마를 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버지는 정치와 역사 이야기를 좋아하셨고, 나는 그 시절 리더라는 개념을 처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48세가 된 지금, 인생의 중턱에서 다시 ‘왕건’을 떠올리며 느끼는 건 단순한 향수가 아니라, 인간과 권력, 관계에 대한 통찰이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리더십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기는 하다. 나이어린 여대생이 서먹한 아버지와 거실에서 대하드라마를 본다는것 자체가 평범하지는 않았으니까.

2000년, 아버지 옆에서 ‘왕건’을 처음 마주하던 일요일 밤

2000년이면 나는 대학생이었다. 학교를 휴학하고 학사 편입을 준비하던 시기, 다시한번 공부에 대한 부담감과 함께 아직 세상에 대한 이해는 얕았고, 머릿속은 하고 싶은 일과 막연한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나이였다. 그런 내게 주말 밤이면 집 거실에서 흘러나오던 장중한 음악과 함께 시작되는 KBS 대하사극은 특별한 ‘의식’처럼 다가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이 바로 ‘태조 왕건’이다.

우리 집에서 주말 저녁 9시는 ‘드라마 시간’이었다. 아버지는 역사 드라마를 누구보다 좋아하셨고, 평소 말씀이 많지 않으셨지만 드라마를 보실 땐 유독 자세가 곧아지셨다. 그런 아버지 옆에 앉아 나는 처음으로 ‘왕건’이라는 인물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드라마는 후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신라가 몰락하고 후백제(견훤)와 후고구려(궁예)가 대립하던 혼란한 시기,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송악의 인물 왕건이 민심을 얻고 고려를 건국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다룬다.

이야기는 단순히 영웅의 성공담이 아니라, 복잡한 인간관계와 충성심, 전략, 지략, 그리고 배신과 용서에 대한 서사였다. 왕건이 수많은 장수와 신하를 다루는 장면에서 나는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의 의미를 처음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사회라는 조직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고, 대학교 수업이나 동아리 안에서 ‘선배’ 혹은 ‘조장’ 같은 작지만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의 관계에 민감했다. 그런 시절에 ‘왕건’은 단순한 역사 속 왕이 아니라, 한 조직의 리더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은 존재였다.

왕건이라는 이름에 담긴 신념과 인간적인 리더십

‘태조 왕건’이라는 인물은, 지금 생각해도 한국 사극사에서 가장 입체적으로 묘사된 캐릭터 중 하나였다. 배우 최수종이 연기한 왕건은 냉정한 전략가이자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인물로, 시청자에게 깊은 신뢰를 주는 리더의 표본이었다.

드라마 초반부,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으면서 그를 충실히 따르던 충직한 장수였다. 하지만 궁예가 점차 폭정을 일삼고 민심을 잃자, 왕건은 고뇌 끝에 그를 폐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 장면에서 나는 처음으로 ‘충성’과 ‘정의’ 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했다.

왕건은 단순히 명분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냉정히 분석했고, 전쟁에서는 수많은 전략과 외교를 통해 불리한 전세를 뒤집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패한 적장에게도 관용을 베풀 줄 알았고, 신하들의 실수를 모두 기억하면서도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 왕건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후삼국 통일 전쟁은 단순한 권력의 확장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안정과 평화를 지향한 여정으로 묘사된다. 그가 말하는 '천하통일'은 단순한 정복이 아닌, 사람을 품는 방식의 정치였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왕건이 늘 주변의 반대 속에서도 ‘민심’을 최우선에 두었다는 점이다. 견훤, 궁예, 왕건은 모두 영웅이었지만, 시대와 민심을 읽고 실천한 자만이 나라를 얻었다는 메시지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리더는 사람을 관리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읽고 지켜주는 자여야 한다’는 걸 배웠다. 20년이 지난 지금, 조직에서 후배를 이끄는 자리에 선 내게도 여전히 그 메시지는 가슴 깊이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나도 유효한 리더십의 교과서, ‘태조 왕건’

이제 나는 48세가 되었다. 육아로 경력단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나의 일을 하고 있고, 한 가정을 책임지고 아이의 부모가 된 지금, 나는 늘 누군가의 앞에 서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런 내게 ‘태조 왕건’은 단순한 역사극이 아니라, 사람과 관계, 조직과 리더십에 대한 실전 지침서처럼 느껴진다.

드라마 속 왕건은 이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늘 흔들리고 고민하고, 때론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놓인 상황과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가장 ‘책임 있게’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진짜 리더는 바로 그런 모습일 것이다.

이 드라마가 특별한 이유는, 단지 과거의 역사를 재현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지금 시대에도 유효한 가치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신뢰, 책임, 전략,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예의와 공감.

‘태조 왕건’을 다시 떠올리면, 나는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말수 적던 아버지가 왕건의 정치철학에 대해 말하시던 순간들, 나에게 역사란 단지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지혜라는 것을 처음 가르쳐준 사람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건 어쩌면 그런 리더일지 모른다. 적을 이기기보다 내 사람을 지킬 줄 아는 리더. 강함보다 포용을 택할 줄 아는 리더. 역사는 돌고 돈다지만, 진짜 리더의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을 나는 ‘태조 왕건’을 통해 처음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