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부터 2005년 초까지 방영된 KBS2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임수정, 소지섭 주연의 정통 멜로드라마로, 불우한 삶을 살아온 남자와 상처받은 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수많은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특히 마지막 회의 엔딩은 대한민국 드라마 역사상 가장 잊히지 않는 결말 중 하나로 손꼽히며, 방영 이후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운을 남기고 있다. 당시 나는 28살, 회사 생활 4년 차로 감정적으로 지치고 인간관계에 회의감이 들던 시기였다. 야근 후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쓸쓸히 울었던 밤들.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단지 극적인 설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삶이란 게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는 시기, 우리가 모두 감당하고 있었던 외로움의 무게 때문이었다. 지금 48세가 된 이 시점에서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다시 꺼내보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그 시절의 내가 느꼈던 감정들과 다시 마주하는 일이다.
눈물 없인 볼 수 없었던 월·화 밤, 스물여덟의 나를 위로해준 드라마
2004년 겨울, 나는 28살이었다. 회사 입사 4년 차. 일에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그만큼 감정은 메말라가던 시기였다. 매일 아침이 반복 같았고, 인간관계는 점점 피곤해졌다. 연애는커녕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눌 여유도 없었다. 그런 내게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었다. 그건 감정을 잊어가던 내게 다시금 사랑이란 감정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치유의 시간이자, 감정의 재생 장치였다.
이 드라마는 한국에서 자란 뒤 호주로 입양되었다가 버림받은 남자 ‘차무혁’(소지섭)과, 아이돌 매니저로 일하며 외로움을 감춘 채 살아가는 여자 ‘송은채’(임수정)의 이야기다. 무혁은 교통사고로 뇌에 총알이 박힌 채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고, 어머니를 찾아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운명처럼 은채와 만나게 된다.
그해 겨울, 월요일과 화요일 밤이면 나는 퇴근 후 방에 불도 켜지 않은 채 TV만 바라보았다. 침묵이 많고, 배경음악이 슬프고, 인물들의 표정이 모든 걸 말해주는 드라마였다. 너무 말이 없어 오히려 감정이 더 짙게 스며들었다.
소지섭의 무표정한 얼굴, 그 안에 담긴 절절한 눈빛은 당시 20대 후반의 나처럼 사랑을 잃은 사람, 상처를 감춘 사람, 말을 아끼는 사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나 자신 같았고,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사랑한다’보다 ‘미안하다’가 먼저 나오는 이 드라마는, 우리가 사는 방식이 사랑을 미루는 삶이라는 걸 깨닫게 해줬다. 늘 ‘괜찮은 척’하면서, ‘다음에 말해야지’ 하며 하루하루를 넘겼던 나의 모습이 무혁과 너무 닮아 있었다.
사랑보다 먼저 했던 말, “미안하다”에 담긴 진심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제목부터가 독특하다. 대부분의 로맨스 드라마가 사랑을 중심에 놓지만, 이 드라마는 사과와 용서를 먼저 이야기한다. 아마도 그게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더 닮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차무혁은 그 어떤 것도 가져본 적 없는 인물이다. 사랑도, 가족도, 건강도 없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품은 채 생을 정리하려 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은채가 다가온다. 은채는 밝고 따뜻한 사람이지만, 그 안엔 커다란 외로움이 숨어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아픔을 조금씩 알아가며 가까워진다. 그런데 그 감정은 너무도 아프게 진행된다. 사랑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상황, 말하고 싶지만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 그리고 마지막을 준비하며 함께하는 슬픔. 그 모든 감정들이 드라마 전체를 짙게 물들인다.
무혁이 은채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단지 한 남자의 고백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유서 같았다. 사랑한다는 말 하나조차 제대로 전할 수 없던 삶, 그 모든 시간을 대신한 두 단어였다.
OST ‘눈의 꽃’, ‘슬픈 사랑’, ‘처음부터 지금까지’ 등은 극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눈 내리는 장면에서 흐르던 음악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그 음악만 들으면, 여전히 가슴 한쪽이 먹먹해진다.
드라마는 단순한 눈물 유발기가 아니었다. 사랑을 잃은 사람,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 삶의 끝을 준비하는 사람. 그 누구에게도 한 줄기 위로가 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은 내 20대 후반, 감정을 숨기며 살던 나에게 정확히 와 닿았다.
사랑은 끝나도, 감정은 남는다…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그 말
지금 나는 나이를 먹었고 생각은 많이 변했다. 세상 역시 빠르게 변했고, 감정은 더 조심스럽고, 표현은 더 계산적이 되었다. 사랑이란 감정도, 예전처럼 순수하게 꺼내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여전히 내 마음 한 켠에서 감정의 원형처럼 남아 있다. 우리가 왜 사랑하는지, 왜 말하지 못했는지, 왜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오는지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상사이고,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하다. 책임지는 일이 많고, 감정을 솔직하게 꺼내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럴 때면 문득 이 드라마의 장면이 떠오른다.
사랑은 결국 시간 안에 말해야 한다는 것. 지나간 후에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미안하다는 말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겨울, 나는 매주 울었다. 그 울음은 단지 슬퍼서가 아니라, 내 감정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기쁨이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그 말을 가끔 되뇐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건 아마, 누구나 한번쯤 가슴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말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