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MBC에서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성 군주인 선덕여왕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한 대하사극으로, 고현정, 이요원, 엄태웅, 김남길, 박예진 등 강력한 배우들이 총출동하여 정치와 권력, 운명과 여인의 삶을 깊이 있게 풀어낸 작품이다. 뛰어난 연출과 스케일, 그리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여성 리더십의 서사를 바탕으로 시청률 40%를 넘긴 국민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여왕이 신라시대에는 적지않게 있었다. 그리고 유리천장 여성의 차별이 존재하는 그때 그시절 한창 직장에서 구르던 나에게 선덕여왕은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당시 나는 여성으로 사회 조직 내에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절감하던 시기였다. 선덕여왕이 보여준 선택, 결단,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신념은 내게 깊은 울림을 남겼고, 지금까지도 리더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하는 작품으로 남아 있다.
32세, 나에게 여왕의 리더십이 전해준 무언의 힘
드라마를 보던 시기에 아마도 나는 30대 초반의 열정적인 직장인이었다. 회사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지만, 회의 자리에서 나의 의견은 쉽게 묵살되기 일쑤였고, 내 목소리는 번번이 ‘감정적인 주장’이라는 말로 폄하되었다. 그렇다고 같은 또래의 동료사이에서는 성별의 차별이 그리 심했던건 아니다. 다만 직책이 올라갈수록 연배가 많을수록 그런 차이점이 미묘하게 느껴지곤 하였다.
그런 시기에 MBC에서 방영된 사극 《선덕여왕》은 마치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던져주는 작품처럼 느껴졌다. 주인공 ‘덕만’은 신라의 공주로 태어났지만,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로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며 숱한 고난을 겪는다. 그녀는 존재조차 지워진 채 유배된 삶을 살지만, 결국 스스로 정체성을 되찾고 정적과 대적하며 신라 최초의 여성 군주 ‘선덕여왕’에 오른다.
이 드라마는 단지 ‘권력 투쟁’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당했던 한 인간의 삶,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림 없이 백성의 안녕과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고자 했던 리더의 신념이 담겨 있었다. 당시 직장 내에서 나 역시 ‘여성의 목소리’, ‘이름 없는 사람의 의견’이 얼마나 쉽게 무시되는지를 매일같이 체감하고 있었기에, 덕만의 결단과 그 과정에서의 외로움은 마치 내 이야기를 보는 듯했다. 그당시 나는, 이 드라마를 통해 ‘리더십이란 무엇인가’, ‘권력은 어떤 대가를 요구하는가’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사내정치에 몰입하거나 그런건 아니었다. 그냥 대리만족 이랄까?
덕만과 미실 – 두 여인의 충돌, 권력의 이면을 꿰뚫다
‘선덕여왕’은 수많은 정치 사극 중에서도 유독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이유가 있다. 그 중심에는 두 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선덕여왕’ 덕만(이요원)과 신라 정치의 실세이자 카리스마 넘치는 야망가 ‘미실’(고현정)이다. 이 드라마는 권력을 좇는 두 여인의 충돌을 일회성 갈등이 아닌, 이념, 가치관, 신념, 역사관의 충돌로 풀어간다. 덕만은 태생이 신분의 중심이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정체성을 잃은 채 유배된 삶을 살았고 백성의 아픔을 직접 겪으며 현실을 몸으로 체득한 인물이다. 그녀는 이상과 실용, 사람의 마음을 아우르는 포용과 결단의 리더십을 보여준다. 반면 미실은 철저한 실리주의자다. 냉정한 판단력과 전략적 사고로 신라를 실제로 통치해온 존재이지만, 그 권력의 유지 수단은 때때로 위협, 협박, 암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신념 또한 단순한 권력욕이 아니라 혼란스러운 시대에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정치적 합리주의였다.
이 두 인물이 마주할 때, 단순히 ‘선과 악’, ‘영웅과 악당’의 구도가 아닌 두 종류의 정치 철학이 맞부딪히는 서사가 형성된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들의 대립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리더의 모습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되묻는다. 이동을 함께했던 김유신(엄태웅)과 비담(김남길)이라는 인물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김유신은 신의처럼 충직하면서도 사려 깊은 전사였고, 비담은 피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끝내 자기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슬픈 야망가였다. 특히 비담과 덕만의 감정선은 정치적 서사 속에 잠시 피어오른 가장 인간적인 사랑이었고, 그 사랑이 역사 앞에 어떤 비극으로 귀결되는지를 보여준 장면은 많은 시청자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선덕여왕’은 단순한 역사 재현이 아니라, 정치의 본질과 인간의 운명, 그리고 시대를 움직이는 리더란 무엇인가를 아주 깊고 복합적으로 풀어낸 완성도 높은 서사극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선덕여왕’을 살고 있다
삶은 쉼없이 달려나가야하는 레이스와 같다. 예전에 동물의왕국같은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잠깐 보았는데 바다의 참치는 헤엄을 멈추면 직식해 죽는다고한다. 끊임없이 아가미로 물이 빨려들어가야하는데 헤엄을 멈추면 그게 멈춰서 질식한다고 기억이 난다. 그 방송을 보면서 참치가 조금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죽을때까지 매우 빠른 속도로 계속 헤엄을 쳐야하잖아. 지금의 나 역시 아니 이시기를 살아가는 우리나라 중년층 세대는 다 비슷할거 같다. 본인이 속한 곳에서 한 조직의 일원으로서, 때론 후배를 이끌어야 할 선배로서 끊임없이 ‘결정’하고 ‘버티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가끔, 덕만이 망설임 없이 결정을 내리던 장면이 떠오른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칼을 쥐며, 때로는 사랑마저 내려놓으며 그녀가 선택했던 수많은 길들. 그리고 그 뒤에는 미실처럼 치열하게 자신을 증명하려 했던 또 다른 이들도 있었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자기만의 ‘선덕여왕’ 서사 속을 살고 있는 것 아닐까. 어떤 사람은 미실처럼, 철저히 전략적으로, 현실의 타협 속에서 길을 찾는다. 또 어떤 이는 덕만처럼, 불가능해 보이는 이상을 품고 조금씩 주변을 설득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리더가 되고 싶은가, 내가 어떤 결정을 후회 없이 내릴 수 있는가이다. ‘선덕여왕’은 그런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나 역시 오늘 하루, 내 작은 선택 하나에도 의미를 담기 위해 또 다시 고민하고 다짐하게 된다. 여왕이 되기 위한 자격이란 결국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걸 그녀는 이미 2000년 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