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KBS2에서 방영된 드라마 ‘프로듀사’는 실제 KBS 예능국을 배경으로 하여 방송국 피디(PD)들의 일상과 현실, 갈등과 성장,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관계와 사랑을 담아낸 휴먼 오피스 드라마다. 김수현, 공효진, 차태현, 아이유 등 화려한 출연진과 더불어, 리얼 다큐 형식을 가미한 신선한 연출 방식, 예능과 드라마 사이를 넘나드는 독특한 서사 구조로 주목을 받았다. 직장에서 닳고 닳았던 당시 나는 조직 내에서의 협업, 인간관계의 거리, 감정과 업무 사이의 균형을 고민하던 시기였다. 드라마가 좀 특이한 부분도 있었지만 약간 리얼리티같은 형식이라 더 몰입하면 보았던거 같다. 그리고 방송국이든 일반 직장이든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프로듀사’는 단순한 드라마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회사생활을 고스란히 투영한 이야기로 받아들일거 같다.
프로듀사, 나의 회사생활을 은유한 드라마
곧 40을 바라보던 나는 회사에서는 중간관리자 역할이 주어졌고, 한쪽에서는 후배를 챙겨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윗선의 눈치를 봐야 했다. ‘리더도 아니고, 신입도 아닌 나’라는 정체성 속에서 무거운 회의실 공기와 복잡한 회식 자리 사이를 부유하던 시절. 그 무렵 접한 드라마가 바로 "프로듀사"였다. 다만 이게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아마도 이 드라마를 시청하던 비슷한 연령대의 또다른 나들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같은 마음으로 시청하지 않았을까?
‘프로듀사’는 예능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과 갈등은 우리가 회사에서 겪는 거의 모든 상황과 닮아 있었다. 김수현이 연기한 백승찬은 갓 입사한 신입 PD로, 업무보다 인간관계가 더 어렵게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캐릭터 – 공효진의 탁예진, 차태현의 라준모, 아이유의 신디 – 각기 다른 위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치 우리가 속한 조직의 축소판처럼 보여주었다.
내가 이 드라마에 깊이 몰입했던 이유는 바로 그 ‘낯익은 현실성’ 때문이었다. 회의실에서 웃고 있지만 속은 끓는 감정, 선배의 애매한 조언에 끄덕이면서도 마음은 불편한 순간,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어색한 거리감. 이 모든 게 극 중 장면이 아니라 내 일상처럼 느껴졌다. ‘프로듀사’는 드라마지만 다큐멘터리 같았고, 코미디 같지만 묘하게 진지했고, 가볍게 시작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남는 여운을 남겼다.
미생이 우리나라에서 대박을 냈듯이 프로듀사 역시 같은 길을 지나온거 같다. 드라마가 흥행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 기억속에 프로듀사는 미생과 같은 느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예능국이라는 전쟁터,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
‘프로듀사’의 배경은 KBS 예능국이다. 실제 방송국을 모델로 삼아, 방송국 내부의 업무 시스템, 방송 제작 과정의 복잡함, 출연자와 제작진 사이의 미묘한 긴장관계를 리얼하게 그려낸다. 무엇보다 인물 간의 관계 구도가 탁월했다. 백승찬(김수현)은 원칙주의자이자 이상주의자.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신념이 쉽게 부딪히고 부서진다는 걸 경험하게 된다. 그가 존경하던 탁예진(공효진)은 일에 있어서는 냉정하고 유능하지만, 감정 앞에서는 솔직하지 못한 인물이다. 라준모(차태현)는 가장 오래된 예능 PD지만, 늘 변화 앞에서 불안해하며, 아이유가 연기한 신디는 대중의 사랑을 받지만 누구보다 외로운 스타였다.
이 네 명은 마치 회사 안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인간형을 상징한다. 신입 사원, 선배, 중간 관리자, 외부 협력자. 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사건들 – 이메일 한 줄, 회식 자리의 농담, 녹화 중 발생한 갈등 – 그 모든 것이 직장인의 일상과 똑 닮아 있었다. 드라마는 이들의 관계를 단선적으로 그리지 않았다. 사랑이 있어도 쉽게 말하지 못하고, 신뢰가 생겨도 금방 깨지고, 가까워졌다 싶으면 다시 멀어진다. 하지만 그런 반복 속에서도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 우리 사회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정서였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건 바로 이 드라마의 미학적 연출이었다. 페이크 다큐 형식, 즉, 카메라가 인물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속마음을 인터뷰하듯 담아내는 방식은 감정에 진입하는 경계를 낮췄고, 시청자들에게 인물들을 더욱 가깝게 느끼게 만들었다. 마치 내 옆자리 동료가 겪은 일처럼, 프로듀사의 이야기는 너무도 현실적이라서 아름다웠다.
회사 생활은 결국 ‘사람’을 배우는 여정이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매일 반복되는 수많은 회의, 프로젝트, 협업, 갈등을 겪으면서 이제는 조금은 조직의 언어에 익숙해지며 지금가지 살아왔을것이다. 나 역시도 그때에도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래왔고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어렵다. 감정은 도망치고, 말은 미끄러지고, 나의 진심이 때론 오해로 돌아올 때도 많다.
‘프로듀사’를 다시 떠올리면, 그 안의 인물들이 정말로 내 모습 같아서 자주 멈춰보게 된다. 말을 아끼는 신입 사원, 자신감 뒤에 숨은 불안을 가진 선배, 사랑하지만 거리를 두는 동료. 우리 모두는 그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드라마는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소한 서사가 가장 진한 감정을 남겼다.
그리고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돼. 당신은 지금도 잘하고 있어.” 회사란 전쟁터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성장의 학교일 수도 있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서로를 붙드는 작은 공동체일 수도 있다. ‘프로듀사’는 그런 우리의 삶을 카메라 하나로 조용히 비춰준 작품이었다. 지금도 나는 회의 끝에 복도를 걸으며, 이따금 백승찬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오늘도 잘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