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부터 2002년까지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는 조선왕조 마지막 여왕이자 대한제국 황후로 즉위한 민비의 삶과 죽음을 중심으로, 혼란한 조선 말기의 정치상황과 외세의 개입 속에서도 조국을 지키고자 했던 한 여성의 치열한 투쟁과 고뇌를 그려낸 작품이다. 이미숙의 압도적인 연기력과 함께 정통 사극의 묵직한 연출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으며, 최고 시청률 30%를 넘기며 대하드라마의 품격을 증명했다. 나는 당시 24세, 편입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역사에 대한 공부도 필요했고 관심은 많았지만 감정적으로 이입하진 않았던 나였는데, 이 드라마를 통해 ‘역사 속 여성’이라는 존재에 처음으로 마음을 쏟게 되었다. 인생을 어느정도 경험하고 지금의 나이가 된 나는, ‘명성황후’를 떠올리며 다시금 질문한다. ‘조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진심으로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2001년의 나, 역사와 감정은 별개라 믿던 시절이었다
2001년이면 나는 24세였다. 다니던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학사 편입을 준비하고 다시 새로운 기회의 자리를 잡으려는 시기. 다시 캠퍼스 낭만 대신 대학 도서관 책상 앞에 앉아야 했고, 세상은 여전히 바쁘고 복잡했다. 그 시절 내 관심사는 주로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취업, 점수, 자격증, 그리고 경쟁. ‘역사’는 시험의 한 항목이었을 뿐, 가슴 깊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늦은 밤 우연히 본 드라마 ‘명성황후’ 한 장면이 나를 멈춰 세웠다. 당당하게 고종을 향해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명성황후, 위로는 청나라와 일본, 아래로는 조선 내부의 척족세력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키려는 그녀의 눈빛은 너무도 강렬했다.
드라마는 그녀를 단순한 비운의 여성이 아닌 역사의 중심에서 운명을 주도하려 했던 ‘정치가’로 그려냈다. 그 모습이 나를 사로잡았고, 처음으로 “역사 속 여성도 이렇게 강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나는 매주, 드라마를 기다렸다. 시험 공부보다 더 몰입했던 시간. 그건 단순히 극의 흥미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잊히지 않아야 할 여성”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갚고 싶었던 내 감정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감정과 전개, 민비의 삶은 지금도 질문을 던진다
드라마 ‘명성황후’는 단순한 정통 사극을 넘어, 국가와 여성, 권력과 운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안고 있던 작품이었다. 이미숙이 연기한 민비는 처음에는 연약하고 조심스러운 궁중의 인물이었지만, 점차 조선의 정치 중심으로 올라서며 점점 더 강인하고 결단력 있는 여성으로 변모한다.
그녀는 왕을 대신해 국정을 다스렸고, 때로는 대원군과 갈등하며 개혁을 추진하려 했고, 또 한편으로는 외세의 틈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한 외교전을 펼쳤다. 그녀의 선택은 늘 정답일 수 없었지만, 그 선택의 무게는 보는 내내 가슴을 누르듯 묵직했다.
드라마 속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명성황후가 일본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궁궐을 지키겠다 선언하는 대목이었다. 이미 그 순간, 그녀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지만, “누군가는 여기를 지켜야 합니다.” 라는 대사는 지금도 내 마음을 아리게 만든다. 그건 단지 드라마 속 한 줄이 아니라, 역사의 수많은 사람들 대신 그 자리에 남겠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이 드라마는 허구적 각색과 논란도 존재했다. 그렇지만, 드라마 ‘명성황후’가 가진 본질은 “한 여인이 감당해야 했던 역사적 비극과 선택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보며,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녀가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48세의 내가 기억하는 명성황후, 그건 한 사람의 생이 아니라 전체의 질문이었다
이제 나는 아내이고 엄마이다. 더 이상 시험을 위해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자주, ‘기억해야 할 역사’에 대해 고민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명성황후’가 있다.
그녀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었고, 모든 걸 막을 수 없었지만, “그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그건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이 주어지는 과제 아닐까. 정답을 모르더라도, 무너지더라도, 우리는 버텨야 하고, 나아가야 하고, 무엇보다 책임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명성황후’는 지금까지도 내 인생 드라마다. 그건 가슴을 울리는 드라마이자, 내 안의 기억을 흔들어 깨우는 역사다.
그녀는 사라졌지만, 그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역사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