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S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상속자들’은 이민호와 박신혜를 중심으로, 상류층 자제들이 모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갈등, 성장의 이야기를 다룬 학원 로맨스 드라마다. 금수저, 흙수저라는 계급적 갈등 구조를 중심으로 청춘의 아픔과 사랑을 감성적으로 그려내며 당시 큰 인기를 얻었다.
부유한 상속자들과 서민 출신 여주인공 사이의 로맨스라는 고전적인 설정 속에서도, 등장인물들의 복잡한 감정과 날선 대사, 세련된 연출이 돋보이며 2013년 후반기 화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내 삶을 뒤돌아보면 금수저나 흙수저는 아니기에 감정의 이입이 일어나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나 역시 대한민국 평범한 인생이라 나 역시, 한창 회사를 다니며 현실의 벽을 느끼던 시기였다. 청춘의 열정과 상처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 이 드라마는, 단순한 로맨스 그 이상이었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서, 상속자들을 만나다
2013년 가을, 어느덧 나는 직장생활 9년 차였다. 치열하게 살아가던 중,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마주친 드라마가 있었다. 반짝이는 교복, 강남의 고급 주택가, 까칠한 고등학생들의 싸늘한 대사. 바로 《상속자들》이었다. 첫 느낌은 솔직히 ‘아, 또 하나의 고교 로맨스구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드라마에 조금씩 빠져들었다. 물론 내가 고등학생이던 90년대 후반, 이런 세상은 상상도 못했지만 이 드라마는 단순히 ‘잘생긴 상속자와 가난한 여주인공의 로맨스’를 넘어서, 계급 구조 속에서 부딪히는 인간의 감정과 성장의 서사를 담고 있었다.
주인공 김탄(이민호)은 제국고등학교의 상속자이자 그룹 후계자다. 그는 겉보기엔 거칠고 시니컬하지만, 내면엔 불안과 고독을 안고 있다. 차은상(박신혜)은 그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흙수저 소녀다. 청소부의 딸로 살아가며 늘 조심스러웠고, 꿈보다는 현실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이 마주했을 때, 그 간극은 어마어마했지만 그 거리만큼이나 둘 사이의 감정은 더 강하게 타올랐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내가 대학 입학하던 1997년의 서울을 떠올렸다. 지방에서 상경해 낯선 도시에서 적응해가던 나의 모습. 세상은 냉정했고, 사람들은 바빴지만 그 속에서 만난 따뜻한 눈빛 하나가 삶을 견디게 해주던 시절. 상속자들은 그런 낯설고도 익숙한 감정을 내 안에서 다시 일깨워주는 드라마였다.
금수저의 세상에도 눈물이 흐른다
‘상속자들’의 세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금수저'의 삶이다. 기업 후계자, 로펌 자제, 정치인의 아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과 책임을 짊어진 인물들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들의 삶을 화려하게만 비추지 않는다. 오히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외로움과 압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김탄은 형과의 갈등, 가정 내 무시, 상속 구도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최영도(김우빈)는 친구 하나 없던 외로운 존재였고, 유라헬(김지원)은 화려한 삶 속에 늘 허전함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아이들이 만들어내는 감정선은 단순히 10대의 질투와 삼각관계를 넘어,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한 채 끌려가는 존재의 복잡함을 보여준다.
한편 차은상은 그들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다. 경제적 어려움, 신분의 벽, 소외감… 그녀는 김탄의 곁에서 자주 무너지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인물이지만 그녀는 결코 자기 삶을 비하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이 드라마가 흥미로운 건, 결국 ‘누가 이길 것인가’가 아닌 ‘누가 버틸 수 있는가’를 묻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 점이다. 상속자들은 가진 자들의 이야기지만 그 속의 감정은 우리가 겪는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한 용기, 자신의 꿈을 위해 선택해야 하는 희생,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가 주는 기쁨과 고통. 이민호와 박신혜의 연기 호흡은 물론이고, 김우빈, 강하늘, 박형식 등 당시 신예였던 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는 캐릭터의 깊이를 한층 더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드라마의 배경음악, 미장센, 서울과 미국의 풍경, 상류층의 삶과 서민층의 공간 대비 등은 극의 메시지를 보다 강렬하게 전달했다.
‘사랑은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 ‘우리는 부모의 이름 없이도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드라마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직원, 누군가의 팀원으로 살아오던 나 자신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낀다. 나역시 금수저의삶과 흙수저의 인생을 교차로 바라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사건 그리고 내가 누려보지 못했던 인생의 모습을 보며 희열과 분노 그리고 애환을 느끼며 드라마를 시청하게 된다. 결국 금수저든 흙수저든 저들은 누군가의 인생이고 삶이다. 그렇기에 이렇게 나를 돌아보고 또 다른 시각으로 삶을 성찰하게 하는거 같다.
상속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각자의 운명을 이어간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연차가 쌓였기때문에 누군가는 내게 "이제는 인생이 안정적이지 않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그 말에 쉽게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나만의 운명을 찾는 중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상속자들’은 말한다. 상속이란 단지 돈이나 지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우리 각자에게도 누군가로부터 이어받은 가치, 상처, 꿈이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이어가느냐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방식으로 누군가의 바람을, 기대를, 혹은 과거를 이어받으며 살아간다. 그것이 무겁게 느껴질 때도 있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을 만큼 힘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스스로 길을 찾고, 사랑하고, 선택하고, 책임지는 순간, 우리는 누구보다 당당한 ‘진짜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 드라마가 끝난 지 10년이 가까워오지만 김탄의 말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다. “너를 지키기 위해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너를 선택한다.” 나 역시 어떤 상황에서도 내 사람을 지키고, 내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상속자들, 그건 결국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